김웅(2018-10-16 19:58:25, Hit : 309, Vote : 70
  부유하는 단상(斷想)의 한 조각

                                   부유하는 단상(斷想)의 한 조각

  코끝으로 스며드는 커피 향에 취해 지나온 시간들을 주섬주섬 챙겨보게 된다. 지독스런 빈곤의 풍경 속에서 무심결에 떠오르는 어린 날들의 몇 안 되는 반가운 모습들이 서멀서멀 머릿속을 헤집고 든다.
  햇살 따뜻한 언덕배기가 그립기만 했고, 가난이라는 단어가 온 몸에 절어있었던 시절이지만, 내 맘 속 깊은 곳에선 작고 가녀린 꿈과 소망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기에 처량한 내적 욕구들은 늘 넝마처럼 그림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채 차가운 바깥세상을 서성이게 했었다. 이마에 맺히는 땀을 연신 훔쳐내면서도 드넓은 바다와 점점이 흩어진 섬들의 반가움을 맘껏 누릴 수 있었던 고갯마루, 올망졸망 정겹게 둘러앉은 갯마을이 훤히 내려다뵈는 바람 닿는 언덕, 연초록의 봄빛위에 재잘거리던 아이들과 염소가족들, 어깨에 걸친 화구가 무거운 줄도 모르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던 바닷길, 강구안 밤바다에 일렁이는 불빛들의 향연, 터벅터벅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거닐던 부두길, 행인의 코끝을 자극하며 구수하게 멸치 다시를 우려내던 낮은 백열등 포장마차 가락국숫집, 어쩌다 아는 이들과 마주앉아 기울이던 정박한 배 갑판위의 흔들리는 소주잔, 달빛마저 졸음에 겨울 시간이 되어서야 누울 공간을 찾아 향하던 텅 빈 밤길……! 그 외롭고 허전했던 숱한 날들을 고집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내 영혼의 껍질들은 나의 작품들이 되었고, 지금은 비좁은 작업실 구석구석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혹 자는 ‘미련하다!’, ‘고집스럽다!’ 할지라도 내겐 쉬이 씻어낼 수 없는 몸의 때처럼 눌러 붙어버린 것이다. 나에게 그림은 매섭고 시립기만 했던 지나온 시간의 틀 속에서 작고 여린 것들 이었지만, 꺼지지 앓은 생명의 온기로 견뎌내게 해준 밤하늘의 먼 북극성 같은 존재였으니 그렇게 악착스러움을 보였던 것 같다. 걸어온 길섶 그 걸음 하나하나에서 가녀린 내 영혼의 누더기가 되어 나를 지켜준 고마움이 있기에 쉬이 털어내지 못한 것이리라…!
   늘 가두어 놓고 숨겨만 두었던 나만의 이야기들을 이제 햇살 고운 언덕배기 하늘아래에 내걸어 보이고 싶다. 바람 고운 날 푯대 끝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자유로운 날개 짓으로 풀어주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나의 고집스러웠던 그 자취들을 환한 미소로 지켜봐 줄 것 같기에 ….
작지만 소중한 내 영혼의 이 조각들이 단순한 경제적 시선만으로 비추어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서도 내게 그래주었듯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매섭고 거친 삶의 어느 날 버거운 숨을 몰아쉬며 오르는 언덕마루 그루터기에서 지친 영혼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커피한잔의 온기처럼 남겨지길 바란다. 세상 모두를 다 내어주고 담아 온 것들이니 다른 누군가에게서도 그럴만한 의미를 남겨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짙푸른 코발트빛 바다를 마주하고서 쉼 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보듬어가며 갯내음 물씬한 포구들이 커피향이 내어준 빈 공간 속으로 둥지를 튼다.
                                                                                              2018. 10.16. 작업실에서 초망.




삶과 생명의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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